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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유래 · 명소


~1900년대

  • 1914. 04. 상도면 8개리와 하도면 5개리를 합하여 화도면이라 칭함
  • 1964. 01. 지둔, 운수, 송천 3개리가 수동면으로 편입되어 법정리가 10개리로 개편
  • 1964. 11. 법정리 10개리중 묵현, 창현, 금남리를 분할, 행정리를 13개리로 증리
  • 1974. 10. 戰災로 청사소실 1952년 면민자력으로 건립된 한식목조건물이 협소하여 1974년 현청사 단층으로 건립
  • 1975. 01. 녹촌리(한센인마을)를 분리 행정리를 14개리로 개편
  • 1980. 01. 행정리 분할계획에 의거 21개 행정리로 증리
  • 1985. 11. 현청사 면적이 협소하여 2층증축
  • 1987. 01. 행정리 분할계획에 의거 23개 행정리로 증리
  • 1990. 09. 행정리 분할계획에 의거 25개리로 증리
  • 1991. 12. 01. 남양주시 화도읍 설치와 관할구역에 관한조례(제810호)에 의거
  • 1991. 12. 01. 화도읍으로 승격
  • 1992. 04. 01. 행정리 분할계획에 의거 28개리로 증리
  • 1994. 04. 01. 행정리 분할계획에 의거 30개리로 증리
  • 1996. 01. 23. 행정리 29개리에서 33개리로 변경
  • 1996. 03. 18. 남양주시관할구역관련 조례(행정리분할계획)에 의거 38개리로 증리
  • 1996. 11. 01. 남양주시직제규칙 개정(제134호)에 의거 과신설로 인하여 3개과 9개계로 직제 개편
  • 1997. 07. 30. 남양주시 통리반설치조례 개정조례(제268호)에의거 행정리를 42개리로 증리
  • 1998. 04. 27. 남양주시 통리반설치조례 개정조례(제268호)에의거 행정리를 50개리로 증리

2000년대 ~ 현재

  • 2000. 07. 15. 남양주시 통리반설치조례 개정조례(제404호)에 의거 행정리를 51개리로 증리
  • 2000. 12. 30. 남양주시 통리반설치조례 개정조례(제421호)에 의거 행정리를 53개리로 증리
  • 2001. 07. 19. 남양주시 통리반설치조례 개정조례(제452호)에 의거 행정리를 54개리로 증리
  • 2003. 02. 04. 남양주시 통리반설치조례 개정조례(제539호)에 의거 행정리를 55개리로 증리
  • 2005. 05. 12. 남양주시 통리반설치 조례에 의거 행정리를 60개리로 증리
  • 2005. 10. 13. 남양주시 통리반설치 조례에 의거 행정리를 62개리로 증리
  • 2006. 05. 18. 남양주시 통리반설치 조례에 의거 행정리를 64개리로 증리
  • 2007. 03. 02. 남양주시 통리반설치 조례에 의거 행정리를 66개리로 증리
  • 2008. 02. 21. 남양주시 통리반설치 조례에 의거 행정리를 70개리로 증리
  • 2009. 08. 06. 남양주시 통리반설치 조례에 의거 행정리를 73개리로 증리
  • 2010. 03. 04. 남양주시 통리반설치 조례에 의거 행정리를 79개리로 증리
  • 2010. 07. 12. 청사이전(마석우리 292-2번지 등 → 마석우리 548번지(비룡로 59))
  • 2011. 09. 29. 남양주시 통리반설치 조례에 의거 행정리를 80개리(613개반)로 증리
  • 2012. 11. 08. 남양주시 통리반설치 조례에 의거 행정리를 82개리(618개반)로 증리
  • 2013. 09. 12. 남양주시 통리반설치 조례 개정조례(제987호)에 의거 행정리를 84개리(630개반)로 증리
  • 2014. 04. 03. 남양주시 통리반설치 조례 개정조례(제1174호)에 의거 행정리를 84개리(635개반)로 증리
  • 2016. 01. 04. 화도수동행정복지센터 개청

지역유래

마석우리(磨石隅里)(맷돌모루, 맷돌머루, 마석우)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양주군 하도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 때 산성리 일부와 계전리를 병합하여 마석우리라 하여 화도면에 편제되었다. 1991년 12월 1일 화도면이 화도읍으로 승격하자 이에 편제되었다.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서 맷돌이 많이 생산되었고, 마을의 길이 돌아서 생겼다고 해서 ‘맷돌머루’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자로 ‘마석우(磨石隅)’이라고도 불린다.

구암리(九岩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대부분의 지역이 양주군 상도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구곡리의 '구(九)'자와 응암리의 '암(岩)'자를 따서 구암리라 하여 화도면에 편제되었다 '응암(鷹岩)'이라는 이름은 한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매'와 관련된 지명이다. 마을 모퉁이에 매처럼 생긴 매바위가 있다고 해서, '매바위'라 불리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응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바위'감투바위'라는 바위 이름도 있는데, 한 바위 위에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또 다른 바위가 올려져 있다. 아마 바위가 두 개가 있어서 '두바위'라고 불리게 된 듯 하며, 한 바위 위에 또 다른 바위가 올려져 있는 모습이 마치 감투를 쓴 것처럼 보여서 '감투바위' 라고도 불리게 된 듯하다.

묵현리 (墨峴里)(멀고개, 먹갓, 묵동)
천마산과 마치고개 밑이 되므로 '먹고개''먹갓'또는 '묵동'이라 하였다. 이곳 묵현리에는 옛 원터가 있었던 곳이라서 '원지(院址)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 곳은 강원도 춘천 방면으로부터 한양으로 가는 무인지경(無人之境)의 대로 변이었다고 한다. 이 곳에 원(院)을 두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으나 약 100여년 전에 폐지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지명만으로 전하여 온다.

가곡리 (嘉谷里)(가오실, 가곡)
지형이 가오리처럼 생겼으므로 '가오실'또는 '가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가오실 서쪽에 있는 우물이름으로 소경우물'쇄경우물이 있다 이 우물에는 옛날 장님이 이 곳의 물을 먹고 눈을 떴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따라서 '소경우물'은 '소경이 마시고 눈을 뜬 우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우물은 '쇄경우물'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소경우물'이 변해서 된 것으 로 보인다.

구암리 (九岩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대부분의 지역이 양주군 상도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구곡리의 '구(九)'자와 응암리의 '암(岩)'자를 따서 구암리라 하여 화도면에 편제되었다 '응암(鷹岩)'이라는 이름은 한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매'와 관련된 지명이다. 마을 모퉁이에 매처럼 생긴 매바위가 있다고 해서, '매바위'라 불리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응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바위'감투바위'라는 바위 이름도 있는데, 한 바위 위에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또 다른 바위가 올려져 있다. 아마 바위가 두 개가 있어서 '두바위'라고 불리게 된 듯 하며, 한 바위 위에 또 다른 바위가 올려져 있는 모습이 마치 감투를 쓴 것처럼 보여서 '감투바위' 라고도 불리게 된 듯하다.

금남리 (琴南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대부분의 지역이 양주군 하도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금대마을의 '금(琴)'자와 남중리의 '남(南)'자를 따서 금남리라 하여 화도면에 편제되었다. '금대마을'은 약 400년 전 전씨 일족이 만든 마을이다. 이 전씨 일족 중에는 음율을 좋아하던 이가 있었는데, 매일 거문고를 타고 놀았다고 해서 '검터' 라고 불리다가, 한자화 되어 '금대(琴臺)'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창현리(倉峴里)
창현리에는 재미있는 마을 이름이 몇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무시울'무시동' 이다. 조선시대 고관이 이 지역으로 낙향하여 정자를 세웠는데, 그 정자 이름을 '무수정(無愁亭)'이라 칭한데서 '무수'로 불리다가 점차로 '무시울'또는 '무시동'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현'노루너머'노루머리'라는 이름도 있는데, 옛날 이 지역에 노루가 많아서 사냥꾼들이 많이 잡았다고 해서 '노루머리', '노루너머'또는 한자로 '장현(獐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답내리(沓內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양주군 상도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답동(沓洞)의 '답(沓)'자와 내동(內洞)의 '내(內)'자를 따서 답내리라 하여 화도면에 편제되었다. 1991년 12월 1일 화도면이 화도읍으로 승격하자 이에 편제되었다 '내동'은 답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안으로 쭉 들어가서 형성된 마을이어서 '내동'이라 불리고 '답동'논골'은 논이 마을 앞으로 펼쳐져 있어서 논 마을 이라는 의미의 '답동(沓洞)'이라 불린다. 순 우리말 이름인 '논골'이라 불리기도 한다.

월산리(月山里)(달미, 당미, 땅미, 월산)
월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서 '달미''당미''땅미'또는'월산'이라 하였다 '월산'이라는 이름은 '달봉''월봉(月峰)''월길산''달기리산'등으로도 불린다. 이렇게 다양한 산 이름들은 모두 달이 뜨는 산이라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월산리에는 어떤 풍수가가 남평문씨의 묘터를 잡으면서, 이 지역의 모양이 등잔 처럼 생겨서 또는 등잔을 걸어 놓은 모양이어서 '등경골'이라 불렀다고 전하는 곳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래와는 달리 가뭄이 들어 물이 귀한 때에도 물이 등잔혈의 기름 과 같이 잘 나오는 마을이라고 해서 '등경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녹촌리(鹿村里)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양주군 하도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녹동(鹿洞)의 '녹(鹿)자와 궁촌(宮村)의 '촌(村)'자를 따서 녹촌리라 해서 화도면에 편제되었다. '녹촌'이라는 이름은 옛날부터 마을 앞산인 잣봉산에 수목이 울창하여 사슴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사슴 녹(鹿)'자를 써서 '녹촌(鹿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차산리(車山里)(수리너머, 수리너머, 수레너머, 차산)

차산리에 있는 고개로 '차유령'수레넘어고개'라는 이름이 있다. 1570년(선조3) 4월 10일 전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숙민공(肅敏公) 유강(兪絳)이 사망하자 묘소를 이 고개 근처에다 정하고 장사를 지냈다. 이후 1639년 증손 유성증(兪省曾)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에 유강의 산소에 석물 및 신도비를 세우는데, 와부읍 덕소로부터 우마차로 운반하여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이후부터 '차유령(車兪嶺)'또는 '수레넘어고개'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이름이 곧 행정구역 '차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맹골 남서쪽 고래산에 있는 바위는 모양이 베틀처럼 생겨서 '벼틀바우' 또는 '베틀바우'라 불린다. 이와는 달리 노인들이 이 바위 근처에서 베틀을 짰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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