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문화
구석기 유적지
조안면 능내리, 조안면 삼봉리, 화도읍 금남리와 화도읍 검터, 조안면 송촌리 두촌유적, 조안면 진중리 마진유적, 조안면 능내리 마재유적 등이 있으며, 석영제 및 규암제 몸돌, 격지, 긁개, 밀개 등을 비롯하여 응회암제 몸돌, 좀돌날몸돌, 좀돌날격지, 흑요석제 격지, 톱니날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신석기 유적지
빗살무늬 토기 : 수석리 유적, 금동 유적, 진중리 유적, 동막동 유적, 퇴계원 유적, 금남리 유적 등이 있다.
청동기 유적지
주거 유적 : 수석리 선사 집터와 가운동 선사 집터가 알려져 있으나 가운동 유적의 경우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지표조사를 통해 기타 유물산포지들이 알려졌는데 이곳에는 집터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남양주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산포지
- 지금동 유물산포지
- 능내리 유물산포지
- 금남리 유물산포지
① 금남리 A(은혜의 집 주변)
② 금남리 B(은혜의 집 맞은편 과수원 일대 밭)
③ 금남리 Ⅰ지점
④ 금남리 Ⅱ지점
⑤ 금남리 Ⅲ지점 - 도곡동 토기산포지
- 삼패 수원지 주변 토기산포지
- 도곡동 입석
- 이패리 유물산포지
- 삼패리 유물산포지
- 목방리 유물산포지
- 덕소유적
① 덕소유적 Ⅰ지점
② 덕소유적 Ⅱ지점 - 월곡리 유물산포지
- 연평리 유물산포지
- 팔야리 유물산포지
- 백양리 유물산포지
- 송능리 유물산포지
- 배양리 유물산포지
- 퇴계원 유물산포지 등이 있다.
※선사시대 분묘는 대부분 지석묘이며 또한 고분에 관계되는 자료 중에 금곡동에서 고분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석묘 유적
삼패리 지석묘, 가운동 지석묘, 지금동 지석묘, 금남리 5호 지석묘, 금남리 지석묘, 진중리 지석묘, 진관리 지석묘, 송능리 지석묘, 퇴계원읍 지석묘, 송촌리 지석묘 등이 있다.
고대사회
삼한시대의 한강유역 - 남양주 지역은 당시 마한지역에 속함
「광개토왕릉비」 내용 중 고리성(古利城)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는 지금의 남양주시 진접읍·진건면 일대로 비정되는 고구려 때의 골의노현(骨衣奴縣)과 음이 근사(近似)하다. 즉 골의(骨衣)→고리(古利)→고리(古離)는 음이 일치할 뿐만 아니라 아차산성 다음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진접읍·진건면 일대를 마한의 고리국(古離國)이라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즉, 고리국은 한강을 경계로 백제국과 인접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삼국시대의 한강유역
남양주지역은 백제 도성과 접하고 있으므로 일찍이 백제국의 영역에 포함되어 백제 수도의 선진문화를 누렸을 것으로 짐작되며 광개토왕의 백제 도성 침공 이후에는 고구려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삼국 간의 본격적인 대립지역으로 등장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양주의 진접읍·진건면 일대는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주(漢州)에 속하며, 757년(경덕왕 16)에는 고구려 때부터 불렸던 골의노현을 황양현(荒壤縣)으로 개칭했는데 한양군(漢陽郡)의 영현이었다. 신라가 점령한 후에도 역시 고구려 때의 명칭인 골의노성으로 불렸으리라 짐작된다. 신라 때 현이 설치된 시기가 통일 초로 보이기 때문이다.
남양주지역은 주치인 하남시 춘궁동 일대와도 가까웠기 때문에 신라나 통일신라 때에도 문화적으로 완전히 소외된 곳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에는 지방 9개 주의 명칭을 비롯한 군현의 명칭을, 759년에는 중앙 관부의 관직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남양주는 이때 한주 한양군 황양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
양주가 고려 지방통치체제 내에서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983년(성종 2)이다. 성종은 처음으로 지방에 12목을 설치하였는데, 이때의 12목은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진주(晋州)·상주(尙州)· 전주(全州)·나주(羅州)·승주(昇州)·해주(海州)·황주(黃州)이다. 이로써 양주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지방 행정구역으로 승격하였다.
양주목의 규모는 지방통치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문종대의 남경유수관에 설치된 주·부·군·현의 숫자인 31개의 지방 행정조직과 그 규모가 유사할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의 범위는 『고려사』 지리지 남경유수관조에 의하면 교하군(交河郡 : 파주), 견주, 포주(抱州 : 포천), 행주, 봉성현(峰城縣 : 파주), 고봉현(高峰縣 : 고양), 심악현(深嶽縣 : 파주), 풍양현(豊壤縣 : 남양주시 진접·진건), 사천현(沙川縣 : 양주)의 3군 6현이었으며, 관할지는 1부 2군 1현이 있었다.
양주목에서 절도사로, 절도사에서 지주사로 강등되었던 양주는 1067년(문종 21)에 남경으로 다시 승격된다.
남경은 서경(평양)·동경(경주)과 더불어 3경 체제를 이루어 지방 제도상 최고의 지위이며 지금의 남양주시를 포함하여 양주·포천·의정부·수원·인천·시흥·평택·화성·파주·고양·김포·강화·안성·안양 등 경기도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이후 남경은 고려 지방행정의 근간으로 200여 년간 존속하다가. 고려 말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로 격하되었다.
한양부로 바뀐 양주는 3속군·6속현을 지배하는 하급 관청으로 지금의 서울·남양주·양주·포천·고양 등 서울과 그 주변 일대만을 다스리게 되었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을 배제하는 강력한 반원 개혁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옛 제도로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정치에 힘입어 한양부는 남경으로 환원하였다.
조선시대
태조는 1394년(태조 3) 10월에 한양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1395년 양주 일부 지역을 한성부(漢城府)로 정하였다. 그리고 1396년 9월 여러 궁전을 위시하여 종묘와 사직·관아·도성 등의 축조 공사를 마쳤다. 이로써 양주를 중심으로 한 남양주지역도 새로운 지역편제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초기 양주는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면서 지양주사(知楊州事 : 오늘날의 서울 근처)로 강등되었다가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고치고 아전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면서 양주군(楊州郡 : 오늘날의 양주)이라 하였다. 1397년에는 군에서 부(府)로 승격되었는데,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서는 도호부가 되었다.
1435년(세종 17)에는 지방행정을 정비하면서 경기의 철원을 강원도에 이속시키고 강원도 소속의 영평·연천·삭녕을 양주에 포함시켰으며, 임강·마전·장단과 양주 담당의 교하·임진·고양 등지의 고을을 원평부 소속으로 옮겼다. 그리고 1466년(세조 12) 양주는 목으로 승격되었고, 군제 편제에 따라 진(鎭)이 설치되었다.
연산군대에는 양주목이 폐지되고 일부가 사냥터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1511년(중종 6)에 다시 복주(復州)되었다. 1393년 11월 각 도에 계수관을 정하였는데, 경기좌도는 한양·철원이며, 경기우도는 연안(延安)·부평(富平)이었다. 이에 남양주지역은 한양에 속하게 되었다.
근대사회
행정구역상 양주군에 편제되어 있었던 남양주 지역은 서울과 인접한 까닭에 수도 방어의 외곽지대에 해당하는 군사적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수도 서울과 경기 서북부, 강원도, 경기 이남을 잇는 관문으로 교통과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역적 중요성으로 인해 1908년에는 연합의병부대였던 ‘전국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격을 계획했을 때 집결지가 되기도 하였다.
남양주지역은 의병투쟁과 이를 토벌하려는 일본군의 일대 접전장이었고, 그 와중에 일본수비대, 헌병분견대, 순사대 등의 가중되는 침탈과 만행으로 지역민들이 받은 피해는 실로 막대하였다 .
이처럼 남양주지역은 사회경제적·지리적 요인으로 일제의 핍박과 침탈이 집중되었으며, 이에 대한 저항으로 의병투쟁도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편 서울과 가까웠기 때문에 신학문의 수용과 이해도 다른 지역보다 쉬워 각지에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육운동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남양주지역 사립학교는 통감부의 교육통제가 강화되는 1908년 이후에도 꾸준히 설립되었으며 통감부 시기 남양주지역에서는 국권 회복과 문명계몽의 목적으로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학교 설립이 일부 지역에 편중되지 않고 남양주지역 전체에 분포하고 있어 이 지역주민들의 교육열과 향학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남양주 국민의 국권 회복에 대한 열의는 1907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일 부채 1300여만 원 상환을 목적으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은 일거에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퍼져 중앙과 전국 도·군·면 단위에서 국채보상회가 설립되었다.
당시 남양주는 양주군에 속해 있던 관계로 남양주지역에서 모금한 국채보상금은 양주군 고주내면 보성회에서 취합하여 중앙으로 송금하였다. 성금 모금은 대개 동·리 단위로 이루어졌으며 마을을 단위 공동체로 하여 자신의 처지에 맞게 성금을 기탁함으로써 국권 회복 운동에 동참하고 있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저항하던 남양주 국민의 애국심과 결집된 힘이 오늘날의 남양주를 있게 한 밑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나아가 국권 위기의 상황에서 보여준 남양주 국민의 단결력은 개인주의가 만연하는 이 시대에 다시 한번 짚어보아야 할 귀감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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