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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선생의 삶

출생

생가 여유당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마현(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5남 3녀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1730~1792)으로 압해 정씨이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海南尹氏(1728~1770)이다.

성장기

수종사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7세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달라서라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라는 시를 지었는데, 부친인 정재원은 수학과 과학에 재능이 있을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정약용은 20세를 전후해 과거공부에 본격적으로 힘을 기울였으며 22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정조 대왕을 만나 총애를 받게 된다. 23세 때 고향 마현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가는 도중 두미협을 지나며 이벽으로부터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정약용은 28세에 드디어 대과(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관직시절

관직시절 규장각

정약용은 28세 때 벼슬에 나아가 정조가 인재 선발을 위해 세운 규장각에서 교육 및 연구과정을 밟는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는 등 정조의 총애 속에서 재주와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세력의 정치적 공격이 고조되어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정약용은 1800년(정조 24) 39세 봄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고향 마현으로 돌아왔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정적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져갔다.

1801년(순조 1) 천주교 신앙의 전파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정적들이 일으킨 신유옥사辛酉獄事 때 정약용은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시절

유배시절 저술 활동

정약용은 유배기간 동안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기회로 바꾸었다. “이제야 참다운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구나!”라고 하면서 학문과 저술 활동에 열중했다.

정약용은 유배 초기에 4서 6경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였고 1818년 해배되기 전 마지막 기간에는 경세학經世學 연구에 몰두하여 《경세유표》·《목민심서》를 저술하고 해배되어 돌아온 다음 해 《흠흠신서》를 완성하였다.

정약용은 학문 이외에 문학적 성과도 매우 뛰어났다. 수많은 서정시 및 사회시를 지어 19세기 초반 조선의 풍속과 세태를 읊으며, 압제와 핍박에 시달리던 농어민의 참상을 눈물어린 시어로 대변해 주었다.

만년시절

자찬묘지명

18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정약용은 평생 지은 저술을 계속해서 수정 보완하는 한편, 소론계의 석천石泉 신작申綽, 노론계의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과 같은 당대 석학들과 학문 교류를 통해 19세기 학술사의 큰 업적을 남겼다.

정약용은 자신의 회갑 때,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썼는데, 여기서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이라 했다. 이는 “백세 이후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됨이 없다[百世以俟 聖人而不惑]”에서 따온 이름이다. 정약용 선생의 학문적 자부심이자, 훗날에 대한 기다림과 기대로 해석되기도 한다.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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