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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선생의 삶

출생

다산 정약용

다산은 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아버지 나주정씨(羅州丁氏) 재원(載遠) 과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송보(頌甫)이고 호는 사암(俟菴), 열수(冽水),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 (門巖逸人)등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성장기

정약용 성장기

10세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가 잠시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고문(古文)을 부지런히 읽었으며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고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다산은 스스로도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고 회고 하였으며 그가 7세 때 지은 “산”이라는 시가 이를 입증하여 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또 다산이 10세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三眉子集)」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다산은 성호의 글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

다산은 이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이 때 서울에는 이가환(李家煥)공이 문학으로서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李承薰)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星湖) 이익(李瀷)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약용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보게 되자 흔연히 학문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것은 지방수재에 불과한 그에게 세상과 학문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관직시절

관직시절

다산은 23세 때 (1783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여러 차례의 시험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다.

28세 때 (1789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으며,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쳤다. 이즈음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여 많은 경비를 절약하였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였으며, 연천 현감 김양직과 상양 군수 강명길의 폭정을 고발하여 처벌하였다. 이를 통해 관리의 책임과 의무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23세때 甲辰年(1784년) 4월 큰 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서울로 오던 두미협(斗尾峽)의 배 위에서 다산과 사돈 관계에 있던 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1786)으로 부터 처음 천주교를 접하였다. 이후 한때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성균관에서 학업에 정진하느라 곧 손을 떼었다. 다산은 천주교 신앙과 서양과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기도 하였으나 갖은 시련과 좌절을 맞보기도 하였다.

유배시절

유배시절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노론과 남인사이의 당쟁이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은 포항 장기로 셋째 형 약종은 옥사하고 둘째 형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서울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이 시기에 다산학의 두축을 이루는 경세학과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500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였으며, 제자들 또한 저술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유배지의 제자들로는 이청·황상·이강회·이기로·정수칠·윤종문 등을 들 수 있다.

만년시절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였다.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 「아언각비」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며 여유 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신작·김매순·홍석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르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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