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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선생의 외가 해남윤씨

정약용 선생의 외가 해남윤씨

정약용 선생의 외가 해남윤씨

어머니 숙인(淑人) 해남윤씨(海南尹氏 / 1728~1770)는 윤덕렬의 딸로 우리 국문학상 대표적 시조시인으로 일컬어지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6세 손녀이자 詩·書에 두루 능했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이다. 정약용 선생의 어머니는 불행하게도 정약용 선생의 나이 9살때인 1770년(영조46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한다.

해남 윤씨는 어초은(魚樵隱) 윤효정(尹孝貞) 이후 명사를 배출한다. 중종 때의 인물로 고산의 고조가 되는 윤효정은 강진군 도암면 덕정리에서 태어났으나 13세에 해남의 갑부 해남 鄭氏집으로 장가를 들었다.

자신의 호(號)처럼 고기잡고 나무를 하며 은거하며 살던 윤효정은 처갓집의 재산을 상속받아 부자가 되었고 이 재력을 바탕으로 해남 윤씨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니 어초은의 4대손 고산 윤선도와 고산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이다. 하지만 18~19세기 정국은 노론이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남인계열이었던 고산의 후손은 정치적으로 불우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정약용 선생은 어린시절이나 벼슬하며 학문을 넓히던 시절부터 외가의 윤씨들과 가깝게 지냈다. 외가로 6촌 형인 윤지범(尹持範, 1752~1821)이나 동갑인 윤지눌(尹持訥, 1762~1815)은 평생의 지기(知己)들이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같이 벼슬하던 윤지눌은 시동인(詩同人) 모임인 죽란시사(竹欄詩社)의 일원이었다. 어려서 같이 공부하고 진사 (進士)가 된 후 1791년 신해사옥(辛亥邪獄)혹은 진산사건으로 순교하는 윤지충(尹持 忠, 1759~1791)은 어머니 윤씨의 조카이니 외사촌 형이 된다. 이외에도 윤종하, 윤종직 등 유수한 문사들이 정약용 선생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귀양살이 중인 정약용 선생을 위로하였다

외가의 도움 중에서 무엇보다도 큰 것은 천여권의 장서와 함께 초당을 내어주어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초당으로 이주 후 귀양이 풀릴 때까지 수기(修己)의 학문으로 六經(시경·서경·주역·춘추·예기·악경)과 四書 (논어·맹자·대학·중용)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완성하고 치인(治人)의 목적으로 一表二書(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를 저술하였다. 이 시절 저술활동에 도움을 주며 학문을 토론하던 제자가 18명인데 이 중 10명이 해남의 외가와 강진의 윤씨들이었다. 이들은 정약용 선생이 유배가 풀린 뒤까지도 제자의 도리를 다하며 스승의 학문계승에 노력하였고 혜장과의 만남 이후 즐기던 차를 보내주는 정성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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