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정구역상 양주군에 편제되어 있었던 남양주지역은 서울과 인접한 까닭에 수도 방어의 외곽지대에 해당하는 군사적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수도 서울과 경기 서북부, 강원도, 경기 이남을 잇는 관문으로 교통과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역적 중요성으로 인해 1908년에는 연합의병부대였던 ‘전국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격을 계획했을 때 집결지가 되기도 하였다.
남양주지역은 의병투쟁과 이를 토벌하려는 일본군의 일대 접전장이었고, 그 와중에 일본수비대, 헌병분견대, 순사대 등의 가중되는 침탈과 만행으로 지역민들이 받은 피해는 실로 막대하였다 .
이처럼 남양주지역은 사회경제적·지리적 요인으로 일제의 핍박과 침탈이 집중되었으며, 이에 대한 저항으로 의병투쟁도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편 서울과 가까웠기 때문에 신학문의 수용과 이해도 다른 지역보다 용이하여 각지에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육운동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남양주지역 사립학교는 통감부의 교육통제가 강화되는 1908년 이후에도 꾸준히 설립되었으며 통감부시기 남양주지역 에서는 국권회복과 문명계몽의 일환으로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학교 설립이 일부 지역에 편중되지 않고 남양주지역 전체에 분포하고 있어 이 지역주민들의 교육열과 향학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남양주민들의 국권 회복에 대한 열의는 1907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일 부채 1300여 만 원 상환을 목적으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은 일거에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어 중앙과 전국 도·군·면 단위에서 국채보상회가 설립되었다.
당시 남양주는 양주군에 속해 있던 관계로 남양주지역에서 모금한 국채보상금은 양주군 고주내면 보성회에서 취합하여 중앙으로 송금하였다. 성금 모금은 대개 동·리 단위로 이루어졌으며 마을을 단위 공동체로 하여 자신의 처지에 맞게 성금을 기탁함으로써 국권회복운동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저항하던 남양주민들의 애국심과 결집된 힘이 오늘날의 남양주를 있게 한 밑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나아가 국권 위기의 상황에서 보여준 남양주민들의 단결력은 개인주의가 만연하는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짚어보아야 할 귀감임에 분명하다.
[수정일자 : 2013년 2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