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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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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태산이다. 그의 생애와 사상과 업적은 태산처럼 크고 높으며, 여러 깊은 골짜기를 안고 있다. 다재다능한 조선의 천재 실학자 정약용의 사상과 철학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며, 이어지고 있다.


다산은 176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당시 초고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 목사를 지낸 정재원이며,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조선 시대의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였다. 다산 선생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조선의 계륵을 꿈꾸다 결국은 오랜 유배생활 끝에 고향인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1783년 다산 정약용은 22세 되는 해에 과거에 응시하여 생원이 되었는데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정조에서 중용강의를 지어 받쳐 칭찬을 받았다. 1789년 정조 앞에서 치른 전시에 합격하여 희릉직장에 제수되었으며 곧이어 초기문신이 되었다. 이 때 한강에 배를 띄어 건널 수 있는 배다리를 설계하였고 직접 배로 만든 다리를 준공해 왕과 수행관리들을 놀라게 했다. 사관원 정원 홍문관 수찬을 맡으면서 수원 화성축조 설계를 맡았으며, 이때 그가 만든 거중기는 성을 짓는데 가장 중요한 기계로 사용됐다. 1794년에는 완의특명을 받아 암행어사로 활동했고, 1795년 정3품 벼슬까지 오르게 되었지만 천주교에 관심이 많다는 이유로 항상 반대파에 공격 대상 이였다. 때마침 청나라 신부 주문무 참입 사건이 일어나 정약용을 탄핵하자는 여론이 거세게 일어 정약용은 충청도로 좌천하게 된다. 그러나 정조 임금의 각별한 배려로 다시 중앙으로 부름을 받아 규장각 교소 일을 맡으면서 편찬사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조정은 천주교 문제로 인한 많은 갈등들이 있었고 이에 다시 정약용이 거론되자 선생은황해도 곡산 부사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곳에서 천연두를 치료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마과회통을 저술하게 된다. 전쟁 속 에서도 정약용이 계속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조 임금의 각별한 애정 때문 이였습니다. 정조 임금이 돌아가시고 순조가 즉위하자 다산은 정족들에 의해 기나긴 위배생활이 시작된다.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는 할머니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게 된다. 천주교의 도입을 절대 반대했던 정순왕후는 천주교에 대한 심한 박해를 시작하는데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가 그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 신유박해 때 정약용의 셋째 형은 옥사하고 둘째형은 산지도로 유배되었으며, 정약용 역시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유배지에서 독서와 창작에만 몰두하던 중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지게 되면서 그 당시 한양, 지금의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당할 위기에 처해지게 되지만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의 여러 공로가 인정되어 유배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 때 정약전은 전라도 흑산도로 그리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각기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마흔 이였다. 다산은 강진읍 주막, 고은 삼방 등에서 거처하다가 1808년 다산의 초당으로 옮겨 기거하면서 많은 책들을 저술, 훗날 우리나라의 많은 자료를 남기게 되었다. 정약용은 유교적인 민본정치의 본래모습을 새롭게 밝힌 사상가였으며, 백성과 함께 살면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였고 잘못된 제도를 바로잡으려 했다. 또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해 관리인들과 정치인들이 실현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가 제시한 백성을 위한 정치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항상 보살펴야 하는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이 바탕 이였고 이것이 곧 정치인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덕목이 철저하게 지켜질 때 백성들은 풍족하게 살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조선 사람들이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이라 하였다. 당시 조선시대에 깊게 뿌리내린 유교정신이 올바르게 적용되지 못한 채 백성을 속박하는 기구로 변질 되자 정약용은 새로운 학문을 연구했고 이 때 그는 서학이라 부르는 천주교의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유교의 배격과 천주교의 도입이 아니라 유교정치를 바탕으로 하되 새로운 시대를 이끌 수 있는 새로운 학문으로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또한 당시 학자들의 사대주의 정신을 비판하고 우리만의 자주적인 학문을 주장하였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항상 청렴, 겸손해야 하며,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잘못된 것을 좋은 것처럼 위장하는 윤리관은 버려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생각했던 정치관이였다. 이런 그의 생각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책들에 잘 나타나 있고 그가 제시한 여러 제안들이 잘 지켜져 조선의 잘못된 세금 제도, 토지 제도, 그리고 지방 목민관들의 그릇된 생각이 바뀌기를 간절히 바랬다. 실현 가능한 정책들을 주장하고 나라를 좀 더 발전시키고자 했던 것이 바로 다산 정약용의 실학 정신 이였다. 1818년 유배가 풀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 정약용은 유배생활에서 쌓은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목민심서, 흠흠신서, 매씨서평 등의 많은 책들을 집필했는데 그의 저서는 500여 편의 여유당전서로 남아있고 1836년 7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뒷날에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함이 없다는 다산, 훗날에 어떠한 성인에게도 자신의 일생과 학문은 질책 받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아직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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