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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자료실

  • 다산 정약용 선생과 관련 있는 자료를 모아 놓았습니다.
  • 부족하나마 다산선생에 관련된 자료를 찾는 여러분에게 작게나마 도움이되시길 바랍니다.
제목 정약용에 대하여
담당부서
등록일 2007/11/27 조회수 11716




본관은 나주이며 호는 다산이다.
아명은 귀농, 자는 미용과 송보, 호는 사암, 열수, 다산, 자하도인, 철마산초 등으로 당호는 여유당이다. 가톨릭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이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조선시대의 유명한 서화가인 윤두서의 손녀이다.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 그의 나이 10세 때 이미 시문을 모아 엮은 시집인 삼미자집을 낼 정도였다.





아버지 정재원이 호조좌랑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나서면서 정약용과 형제들은 한양에 올라와 황사영, 이승훈 그리고 이가환과 같은 여러 실학자들을 만나며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다산은 1789년 그의 나이 2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다산은 그의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거쳐 사간원정언 그리고 사헌부 지평의 자리를 차례로 역임하게 된다.
또한 성균관에 들어간 다산은 폭넓은 학식을 인정받아 정조에게 발탁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다산은 정조의 명을 받고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일을 맡게 된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배다리를 완성하자 정조는 더 한층 다산에게 믿음을 보이고 수원의 화성을 건설하는 중대한 일을 맡기게 된다. 이에 다산은 1793년 돌을 들어 올리는 기계인 거중기를 직접 고안해 화성의 공사기간과 경비를 대폭 단축시키며 성공적으로 공사를 마무리한다.
또 한편으로 다산은 경기도 지역을 암행어사로 순시하며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그 결과로 연천 현감인 서용보와 상양 군수 강명길의 횡포를 직접 목격하고 처벌하기도 한다.

그즈음 다산은 천주교를 처음 접하고 매료되어 여러 천주교 관련 서적에 심취하며 서양과학과 신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다산은 서양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과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실사구시‘ 즉, 실학사상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나 당시 널리 퍼져있던 성리학을 최고로 치던 기존 관리들에 의해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조선의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죽음을 맞이하고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다산에게 큰 시련이 닥쳐온다.
소론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당파 싸움의 여파가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이 싸움에서 다산은 천주교도라는 지목을 받고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이때 다산의 셋째 형인 정약종은 사형을 당하게 되고, 둘째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18년간의 유배 생활은 다산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학문적으로는 풍성한 결실을 맺는 아이러니를 보이기도 했다. 5백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서가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으며 실학을 집대성하는 시간이었고, 또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시기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이청, 이기로, 윤종문 등을 들 수가 있다.




57세 되던 해에 유배 생활을 마친 다산은 그 후 다시는 벼슬길로 나서지 않았고 평생에 걸쳐 쓴 글들을 정리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미쳐 완성을 보지 못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고 <흠흠신서>, <아언각비>, <경세유표> 등의 저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1836년 75세의 일기를 끝으로 죽음을 맞이한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한 탁월한 학자였으며 게다가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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