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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업적

실학의 집대성

사회적인 배경

조선조 지도이념으로 채택된 주자학은 퇴계와 율곡의 융성기를 지나 학파의 분화 속에 학설이 다양화되고 이론이 정밀화 측면에서 발전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학파의 분열과 대립이 객관적 합리성을 잃고 사변적 내지 관념적 체계에 사로잡히게 됨으로써 현실 사회와 유리되어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공론(空論)만을 일삼는 폐단에 빠져 있었다. 특히 임진 · 병자의 양란 이후 사회 · 경제적 질서가 붕괴되는 상황 속에서도 개국 이래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채택된 주자학은 피폐된 사회를 바로잡기는커녕 오히 려 죄없는 백성들을 산 속으로 내몰고 있었다. (탐관오리들의 폭압을 견디다 못해 전 답을 버리고 산속으로 도망치는 것)

실학의 형성시기와 특성

실학은 사회적 혼란기에 통치 이념으로서의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주자학에 대한 반 발과 때마침 중국을 통하여 유입된 서학 및 청대 실학의 영향에 의하여 당시의 학풍이 소홀히 하였던 사회의 현실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추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기풍에 의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혈연 · 사제 · 교우 관계를 통해 형성된 실학은 그 형성시기와 학문적 특성에 따라 다음의 3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실학의 제1기인 18세기 전반의 성호학파(經世致用學派), 제2기인 18세기 후반의 북학파(利用厚生學派), 그리고 제3기는 19세기 전반의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제1기 <천주실의>를 소개한 책으로 유명한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쓴 이수광(李晬光 1563~1628), 성리학에서 실학으로의 전환점에 서 있는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저술 한 유형원(柳馨遠), 탈주자학적 경학해석에 물꼬를 텃던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등 이 활약했던 17세기는 서로 다른 학문적 관심과 배경에서 개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는 점에서 실학의 맹아기라 할 수 있다.

제2기 18세기에는 17세기에 싹텃던 실학적 문제의식과 사상적 요소들이 정리되어 실 학파의 학파적 성립을 보게 된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중심(大宗)으로 하고 권철 신 · 이가환 · 안정복 등이 주축이 되어 제도개혁론을 주장하는 18세기 전반의 성호학 파와 청나라의 문화와 청에 들어와 있는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이자는 담헌 홍대용 · 연암 박지원 · 초정 박제가 등이 중심이 된 북학파가 바로 그것이다. 권 력에서 소외된 기호(畿湖) 남인(南人) 중심의 성호학파가 유형원을 계승하면서 토지 및 행정기구 등 사회제도 개선에 치중한다는 측면에서 일명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 派)”라 지칭하고 지배계층인 노론계열의 북학파가 상공업의 유통과 일반기술의 발전 등 물질문화의 발달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라 지칭하기 도 한다.

제3기 18세기는 실학파가 학파적 면모를 갖추기는 하였지만 그 철학적 입장은 아직도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다. 결국 철학적 기반의 확립은 19세기 전반 다산 정약용에 의해 서 가능해진다. 다산은 성호학파를 학문적 연원으로 하면서도 서학의 영향을 광범위 하게 수용하면서 청대의 고증학적 지식까지 받아들여 경학에 대한 새로운 체계적 해석 을 시도하였다. 230권이 넘는 육경과 사서에 대한 방대한 연구로 경전주석의 전면적 인 새로운 체계를 수립하였다. 특히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성리학의 핵심개념인 리 (理) · 기(氣) · 음양(陰陽) · 오행(五行) 등에 대한 해석에서 주희를 비롯한 종래 성리 학자들과는 다른 주장을 함으로써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 다. 다산의 이러한 탈 주자학적 해석은 실리중심의 실학파가 예학과 의리, 명분을 중 시하는 도학파로부터 철학적 기반에서 완전히 독립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의 표현대로 자신의 몸을 닦는 학문(修己之學)인 육경과 사서의 경학연 구만으로는 학문의 절반밖에 갖추지 못하기에 자신의 경학적 입장과의 연속선상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치인지학(治人之學)인 경세학(經世學)으로서 부패한 사회를 전면 적으로 개혁하려는 목적에서 저술한 “一表二書”(<經世遺表>, <牧民心書>, <欽欽新 書>)로서 나머지 절반을 갖추었다. 수기와 치인은 유학자가 궁국적으로 추구하는 이상 적 인간(修己治人)이 되기 위한 두 개의 수레바퀴인 것이다.

실학의 봉우리를 만들어 낸 다산

흔히 다산을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한다. 이익에서 유형원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 하며 탈주자학적 경학체계를 세워 19세기 초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주장을 한데 묶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용광로 안에 녹였다가 “다산학”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을 완성한다. 한쪽은 이익과 유형원의 학풍(經世 致用)을 이어받고 다른 한쪽은 박제가 · 유득공 등 북학파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북 학(이용후생(利用厚生)을 섭취한 다산은 이들의 학문적 성과 위에서 “다산학”이라는 거대한 실학의 봉우리를 만들어 낸다.

썩어가는 국가의 대들보를 새롭게 바꾸고 허물어진 주춧돌을 단단히 괴는데 평생을 바 친 다산에게 돌아온 것은 18년 동안의 유배라는 혹독한 시련이었다. 모진 고문으로 인 한 육신의 고통과 찾아오는 이 없는 유배지의 쓸쓸함을 밤을 새는 저술 작업으로 극복 한 다산이 가슴속에 붙들고 놓지 않는 말은 “한 사람만이라도 이 책의 값어치를 알아 주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법 당시의 어두운 현실은 그를 시기하고 배척하였으나 오늘날 그는 “한국학의 바다”로서 새롭게 부활하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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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자 : 2011년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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