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흥국사(興國寺)는 별내면 덕송리 수락산 아래에 위치한 봉선사의 말사이다. 599년(신라 진평왕 21) 원광법사(圓光法師)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창건하였으며 처음에는 절 이름을 수락사(水落寺)라고 하였다.
- 그 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여러 차례 절을 중창하였으나 확인할 만한 기록들은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사가(四佳) 서거정이 이 절을 유람하면서 지은 ‘수락사’라는 시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그 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여러 차례 절을 중창하였으나 확인할 만한 기록들은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사가(四佳) 서거정이 이 절을 유람하면서 지은 ‘수락사’라는 시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그는 젊었을 때 여러 산사에서 글을 읽었는데 수락산을 다녀간 것도 2번이나 된다고 한다. 이 시는 수락사의 벽에다 쓴 것으로 일암(一菴)스님이 시를 베껴와 틀린 글자를 바로잡아주기를 청하여 교정해준 것이다. 현재는 『봉선사본말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고 있다.
- 조선 중기 1568년(선조 1) 선조가 아버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당(願堂)을 이곳에 건립하면서 흥덕사(興德寺)라는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1626년(인조 4) 흥덕사를 흥국사(興國寺)로 바꾸었다.
- 1793년(정조 17) 5월에는 정조가 기허(騎虛)스님에게 내탕금을 하사하여 전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지만, 1818년(순조 18) 9월에 대웅전·명부전 등 많은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되었고 만월전(滿月殿)과 양로실(養老室)만이 피해를 면했다. 4년 뒤인 1822년에 다시 기허스님에게 내탕금을 내려 절을 중건하게 하였는데 이 때 대웅전·시왕전·대방 등이 중수되었으며, 연화경(蓮花經) 7축(軸)으로 경회(經會)를 열어 국가의 복을 기원하였다.
- 그리고 1856년(철종 7) 4월에는 청신녀(淸信女) 양씨(梁氏)의 시주로 은봉대덕(隱峯大德)이 만월전을 새로 짓고 단청을 하였으며, 1878년(고종 15)에는 용암(庸庵)장로가 시주금을 모아 대웅전과 대방 37칸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888년에는 제암(濟庵)대덕이 역시 시주금을 모아 영산전(靈山殿)을 건립하였고, 요사채를 중수하여 단청불사를 하였다.이후 신도 강재희(姜在喜)의 시주로 각 법당의 기와를 교체하였고, 대웅전 3존상의 개금불사를 했다. 1917년에는 주지 범화(梵華)스님이 각 전각과 요사채를 중수하고, 기와를 교체하고 단청을 하였다.이와 같이 흥국사는 원광법사가 창건한 이래 중건과 폐허가 거듭되다가 조선 중기 이후에 활발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1790년에는 봉은사·봉선사·용주사·백련사 등과 함께 나라에서 임명하는 관리가 머무르면서 왕실의 안녕을 비는 오규정소(五糾正所)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사격(寺格)이 더욱 높아지기도 했다.
- 이와 같은 사세확장에는 선조의 후원이 지대하였는데 그것은 흥국사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원찰이었기 때문이었다. 『봉선사본말사지』에 의하면 덕흥군은 중종의 아홉째 아들로 선조는 즉위 후 아버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어머니 하동 정씨를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하였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묘를 덕릉(德陵)으로 추존하고자 하였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동대문 밖에서 궁중의 땔감을 마련하게 하고 땔감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묻되 덕흥대원군의 묘소를 지나왔다고 하면 다시 돌려보내고 덕릉을 지나왔다고 하면 술과 음식으로 환대하며 땔감을 높은 값으로 사들였다. 이후 소문은 빠르게 전해져 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덕릉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때부터 흥국사도 자연스럽게 덕절(德寺)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수락사
수락산 속 수락사에 물 마르고 돌 나와 산속이 저문다.
황학(黃鶴)이 나는 옆에 하늘이 낮고 검은 구름 끄는 데 빗발이 난다.
거년(去年)에 스님 찾아 여기 왔더니 구렁에 눈 쌓였고 달이 밝았다.
금년에도 스님 찾아 여기 오니 바윗가에 봄 꽃이 피었다 진다.
거년에도 금년에도 내왕하던 길 산천은 역역하게 옛과 같다.
이끼 낀 길 미끄러워 청려장(靑藜杖) 짚고 샘물이 흐르는데 바람이 분다.
식후에 들리는 종소리 예전대로이다. 벽 위에 시기(詩記) 있는데 먼지 덮었다.
홍수(紅袖) 고금(古今)이란 것, 어찌 구래공(寇萊公)뿐일까.
왕공(王公)의 호기(豪氣) 적음을 내 한 번 웃노라.
스무 해 만에 처음으로 얻은 벽사롱(碧紗籠).